<오렌지만 과일은 아니다>는 지넷 윈터슨이 23살에 쓴 자전적인 소설로 발표되자마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지넷 윈터슨을 인기작가로 만들어주었다.
광적인 기독교 가정에 입양된 지넷은 편집증일 정도로 기도와 선교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약간은 무기력한 아버지와 살고 있다. 지넷은 책읽기를 좋아했지만 집에 책이라고는 여섯권이 있을 뿐인데 그 중 세권은 성경이었다. 학교에서도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일상(선교에 관련되)을 이야기하거나 지옥에 관해 끔찍한 묘사를 해서 다른 아이들을 겁먹게 하는 등 점점 외톨이가 되어간다. 그러다 열여섯이 되던 해 동네 다른 여자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이 사실이 발각되어 엄마와 교회와 갈등을 빚는다. 그리고 집에서 나와 장례식보조아르바이트를 하며 홀로 서게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고 실제의 지넷은 책에서처럼장례식보조뿐아니라 아이스크림장사, 정신병원도우미 등 여러가지 일을 하며 주경야독하여 21살에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한다. 그리고 23살에 첫 소설을 내고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오렌지만 과일은 아니다Oranges Are Not the Only Fruit 는 BBC드라마로도 만들어져서 큰 인기를 모았다.
책의 내용 중 인상적인 챕터(각 장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등 성경의 목차를 따왔다)인 신명기를 옮겨본다.
신명기
시간은 위대한 둔화제. 사람들은 금세 잊고, 지겨워하고, 늙고, 떠난다. 영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나무보트를 만들어 바다로 나가 터키인들에게 대항하는 문제에 심취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시들해지자 살아남은 농부들은 다리를 절며 땅으로 되돌아갔고, 살아남은 귀족들은 서로를 모함하는 계략을 세웠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 전부는 아니지만,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의지하는 것을 이야기로 만든다. 이것이 우주를 설명되지 않는 상태로 두면서 동시에 우주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우주의 모든 것을 살아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시간에 가두지 않는 방식이다. 똑같은 이야기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말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다르게 본다는 것을 상기시킬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이 증명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이들을 믿지 않는다. 확실한 단 한가지는, 매듭으로 가득한 실타래처럼 모든 것이 너무도 복잡하다는 것이다. 모두 거기에 있으나 시작 부분을 찾기가 힘들고 끝을 가늠하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있는 최선은 실드기에 감탄하는 것, 어쩌면 매듭을 더 많이 만드는 일일 것이다. 역사는 흔들기 위한 해먹이고 놀기위한 게임인 것이다. 실뜨기 놀이처럼. 실타래를 발로 잡고, 물고, 다시 풀고, 잠들 때, 실은 여전히 매듭으로 가득한 타래다. 아무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이런 역사로 돈을 많이 버는 사람들도 있다. 출판사들이 곧잘 그랬다.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총명하다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역사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줄여버리는 것은 모든 목적에 부합하는 비 오는 날의 오락거리다. 사람들은 사실인 역사와 사실이 아닌 이야기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무엇을 믿고 무엇을 밎지 않아야 할지를 구별하기 위해서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매일 매일 요나가 고래를 삼키는 이때에, 고래가 요나를 삼켰다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으면 어쩐다? 나는 이제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은 냄새나는 생선 중에서도 가장 냄새가 지독한 생선 이야기만으로 게걸스레 배를 채운다. 왜냐고? 그런게 역사니까, 무엇을 믿어야할지를 아는 것은 유리하다. 역사는 제국을 세웠고 사람들을 제국에 소속되게 했다. 자본과 돈이라는 밝은 영역에...... 흔히 역사는 과거를 부인하는 수단이다. 과거를 부인하는 것은 과거의 본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 생각에 그럴듯하다고 보일때까지 그 정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고, 기능하게 하고, 빨아먹기 위해. 우리는 나름대로 모두 역사가들이다. 그리고 섬뜩한 방식이긴 하나 폴 포트(캄보디아 독재자. 170만명을 죽게 만든.) 는 우리들 모두 보다 더 정직했다. 그는 과거를 모두 생각치 않기로 했다. 과거를 객관적 견해로 다룬다는 속임수를 버린 것이다. 캄보디아에서는 도시들이 불타 없어지고, 지도는 버려지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서류도 없다. 아무것도. 용감한 신세계. 구세계들은 경악했다. 우리는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나 큰 벼룩의 등에도 피를 빠는 작은 벼룩이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과거가 너무 복잡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결말을 지워 버리곤 했다. 살이 탈 것이며, 감자가 탈 것이며, 그리고 기억도. 이게 뭐지? 잊어버려야만 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들의 두서없는 이야기. 또 우리는 결말을 짓지 못하면 아예 이야기 자체를 바꿔 버린다. 죽은자는 말하지 않는다. 죽은 것에는 어떤 매력적인 것이 있따. 죽은 것은 살아 있는 것과 관련되는 그 지겹고도 어지러운 것들(쓰레기와 불만과 애정의 필요) 없이도 그 모든 감탄할 만한 삶의 특징들을 보유한다. 우리는 죽은 것을 경매에 붙일 수도, 박물관에 보관할 수도, 수집할 수도 있다. 지식욕이 왕성하면 일단 자리에 앉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지켜보아야 하기 때문에 차라리 신기한 것을 수집하는 사람이 되는 편이 훨씬 안전하다. 지식욕이 왕성한 사람들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추위를 무릅쓰고 기다려야 할 때도 있고 낚싯대보다 더 비싼, 당신을 자연의 품으로 데려다 줄 유리 보트에 투자해야 한다. 지식욕이 왕성하면, 지금 바다 밑에서 인어와 함께 사는 모든 남자들처럼, 결코 집으로 돌아오지 않게 될 수 도 있다. 아니면 아틀란티스를 발견했던 사람들처럼.
선조 순례자들이 항해를 시작했을 때는 이들을 미치광이들로 보는 사람도 많았다. 역사는 이제 그렇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탐험가가 된 지식욕에 불타는 사람들은 기억이나 이야기 이상의 것을 가지고 돌아와야 한다. 이들은 감자나 담배, 무엇보다도 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행복은 감자가 아니다. 엘도라도는 스페인산 금 이상의 것이었으며, 그러므로 존재할 수없었다. 집에 돌아온 이들은 의미없는 환상 때문에 미치고 말았다. 그러므로 현명한 자들, 신기한 물품 수집가들은 죽은 것들로 자신의 주위를 채우고 과거, 살아 움직이며 존재했던 과거를 회상할 것이다. 신기한 물품 수집가는 다양한 기차의 모습이 상영되는 비디오가 설치된 버려진 기차역에 산다. 그들은 살아 있는 죽은 자들의 원조다. 과거는 과거이기에 한때는 휘어질 수 있던 것이 이제는 겨우 펴늘려질 수 있을 뿐이다. 전에는 마음을 바꿀 수 있었던 것들이 이제는 변화를 겪을 수 있을 뿐이다. 렌즈는 채색되고, 기울어지고, 부서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질서가 널리 보급되는 것......우리가 18세기의 신사이며 마차가 알프스를 덜커덩거리며 넘어갈 때 커튼을 내리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질서를 가장하면서, 존재할수 없는 안전을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이야기 속에서 질서와 균형이 발견된다. 역사는 성 조지다. 역사책을 보면서 나는 종이 두 쪽과 활자 사이에 놓인 혼란스러운 세계를 압축하기 위해 들인 가공의 노력을 생각하며 깜짝 놀라고 만다. 이는 비판의 여지가 없는 진실이다. 신도 이것을 보셨다. 신은 알고 계신다.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그들이 듣거나 본 것을 말하면, 나는 거것을 믿는다. 또한 나는 함께 봤으나 같은 식으로 보지 않은 이들도 믿는다. 나는 서로 다른 평가들을 한자리에 놓을 수 있으며 한결같은 기적을 믿느니, 내가 직접 만든 겨자 소스를 샌드위치에 뿌려 먹을 것이다. 내장을 굴러다니는 문명이라는 절인 쇠고기. 변비는 2차 세계대전 이후로 크나큰 문젯거리가 되었다. 섬유질이 충분치 않은 데다 지나치게 정제된 음식만 먹었기 때문이다. 항상 외식을 한다면 무엇이 속으로 들어오는지 결코 확신할 수 없으며, 그 음식에 대해 받은 정보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썩은, 그리고 썩어가는. 여기 참고할 것이 있다. 당신의 치아를 보존하고 싶다면,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도록......